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이즈레오] 고래의 노래

바벨의 노래 후편


‘청춘’이라는 말은 부끄럽다고 생각해 한 번도 자의로 입속에 굴려본 적도, 뱉어본 적도 없는 말이지만 이쯤이면 나름 괜찮은 ‘청춘’의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멋대로 돌아온 탕아인 왕님도 병석에서 일어났고 3학년이 되어 제 모습을 갖춘 나이츠의 라이브도 깨끗하게 마무리 됐다. 카사군은 그 뒤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건 아직 1학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기대겠지.

어느 날 불쑥 왕님이 졸업 후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꺼냈다기 보다는 흘렸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연습실에 놓아둔 코타츠에서 뒹굴 거리며 펜을 끄적이다 불쑥, 이었으니까. 누구와 같이도 아닌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하루 반나절 이상을 꼬박 가야하는 곳에 가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높은 탑 위에서 고꾸라져버린 그때의 모습. 그리고 이제는 같이 있어줄 사람도 없이 혼자 가겠다니.

“얼마동안?”

“으으음 적어도 1년? 그쪽에서 권유한 거라 다 준비해 준다는 거 같아. 그런 것 보다 세나 이것 봐, 방금 태어난 신곡이야! 아니 명곡이지! 세나 목소리에 잘 어울릴 거 같아. 역시 나는 천재야!”

무어라 말을 하려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모습을 보자 이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탑에서부터 계속된 노래도, 뭐 이정도면 이제 끝을 내도 만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렇게 일주일 전부터 이어진 이런저런 어지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이즈미의 옆에서 평소와 달리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사람이 있었다. 흘끗 시선을 돌려 보자 예상외로 그곳에 있는 것은 정좌를 하고 있는 것은 레오였다. 졸업 직전에 또다시 외국으로 나가게 됐다는 말을 하는 왕님에게 나오려던 말을 참고 그렀느냐고 대답한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뭐야 왕님. 정리는 다 한 거야?”

“악보 정리도 했고 갈아입은 유닛복도 제대로 걸었고 머리도 빗었어.”

평소에 입이 닳도록 닦달을 해도 펜을 놓지 않아 늘 짜증을 내야 했던 일을 스스로 했다니. 두발로 걸어 다니는 사자를 보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즈미에게 레오가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세나, 내일 뭐해?”

“웬일이야 왕님이 내 일정을 다 물어보고.”

“내일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고래보러 가지 않을래?”

겨울바다에서 고래? 당연한 의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수족관이라도 가자는 건가?

“...어디서?”

“우리 집 가는 길에 있는 바다에서.”

졸업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날이었다. 이즈미는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별칭이지만 세나 하우스에서 들은 그 말은 말도 안 되는 크기에 비해 어투만은 마치 잠깐 이 앞에서 놀고 가자는 어린아이의 말 같았다.

“내일 6시 10분까지 학교 앞 우라와(湳海)역이야.”

제멋대로 말을 끝내버린 레오는 이즈미에게 대답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정좌로 굳어진 다리로 뛰어나갔다.

“꼭 와야 해, 세나!”

힘차게 열렸다 닫힌 문 옆에 달력이 팔랑거렸다. 2월 29일, 곧 다가올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해가 뜬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겨울의 전철역은 쌀쌀했다. 목에 두른 목도리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어제의 일방적인 약속 후 이즈미는 몇 번이고 그 말도 안 되는, 고래를 보러가자는 약속의 의미에 대해 물어보려 핸드폰을 들었었지만 한통의 메일도 보낼 수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새하얀 화면을 몇 번이고 쳐다보다 결국 평소보다 이른 알람을 맞추고 이불을 뒤집어 쓴 것이 어제의 마지막이었다. 잠들기 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만약 내일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래 그림이나 그 엇비슷한 무언가를 꺼내들면 핀잔과 불만을 잔뜩 퍼부어주기로. 그리고 역시 너는 아직 어린애라고 비웃어주자고.

하지만 개찰구를 지나자 보인 레오의 모습은 이즈미의 예상과는 반대로 멀끔한 차림새였다. 머리칼에 나뭇잎을 매달지도 않고 헐렁하지만 제대로 목도리까지 감고 있는 이 모습을 보려고 그동안 얼마나 잔소리를 했었던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던 아이가 저만치 자라 아무문제 없었던 냥 굴고 있었다. 깔끔한 모습에 맞는 깔끔한 웃음으로 레오가 입을 열었다.

“20분이면 도착할거야.”

이것 봐 진짜 짜증나게. 세나세나 시끄럽게 이름을 불러내던 저 입도 오늘은 조용하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찾아오던 인스피레이션이라는 것도 오늘은 개점휴업인지 말이 없었다. 두 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역에 몇 분 지나지 않아 커다란 경적소리와 함께 첫차가 들어왔다. 레오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구석 창가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즈미는 바로 그 옆에 앉으려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한 명분의 자리를 띄우고 앉았다. 여전히 둘 사이는 조용했다.

고개를 들어 역의 순환표를 확인했다. 2년 전부터 익숙한 길이었지만 구태여 다시 확인해 5정거장 뒤, 20분이면 도착한다는 사실을 다시 머리에 새겼다. 레오는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즈미도 그런 분위기에 억지로 먼저 말을 꺼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결국 둘만을 실은 전철이 조용히 출발했다. 따라오는 불안감도 같이 실은 채.

 

당연하지만 도착한 바다에 고래는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6시 반을 조금 넘어 눈높이만큼 뜬 태양과 아무것도 없는 겨울의 모래사장, 그리고 고래는커녕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한 바다뿐이었다. 애초에 수심이 옅어 물고기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건 이곳에 살고 있는 그가 더 잘 알 일이었다. 그런데도 레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이즈미가 흘끗거리며 레오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말이 없는 레오는 해변의 끝에 있는 벤치에 앉고서 손을 흔들었다. 앉아 있는다 해도 고래가 보일 리 없겠지만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한명분의 자리를 비우고서 세나도 벤치에 앉았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고래를 보러 왔잖아.”

“왕님이 신카이군이야?”

핀잔을 던져도 반응이 없었다. 평소처럼 말도 안 되는 망상들을 늘여놓으면 적당히 어디로 끌고 들어가 버릴 생각이었는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생각하는 세나의 옆에서 레오는 말없이 일어나 몇 걸음 걸어 넓은 모래사장에 세나를 등지고서 쭈그려 앉았다. 모래 위에 무언가 쓰는지 사각 이는 소리가 한참을 들려왔다. 완연히 낮이라 부를 정도가 됐을 때 쯤 레오가 입을 뗐다.

“있지, 세나. 세나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어. 나, 작곡 이외에는 쓸모없지만 그 정도는 안다고?”

“뭘 안다는 거야?”

“내가 거기에서 혼자 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게 무서운 거잖아? 작년의 나처럼 너덜너덜해질까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나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졸업 후의 예정을 들었을 때부터 꾹꾹 눌렀던 것이었다. 아니면 왕이 떠난 그 탑에 홀로 남아 노래를 불렀을 때부터 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걱정된다! 왜 가는 건데? 가서 어쩔 건데? 그래 네 말처럼 저번처럼, 그렇게 되면, 혼자서 그렇게 되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의자에서 일어난 뒤였다. 아직 모래사장에서 등을 보인 채 일어나지 않는 레오를 향해 계속해서 외쳤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떡할 거냐고! 그리고 고래라니 무슨 헛소리야. 이렇게 얕은 바다에 고래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대체 여기서 뭘 기다리는 건데? 나랑 뭘 기다리는 거냐고, 응? 대답해봐 왕님!”

숨이 찼다. 목이 막혀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였다. 힘들어 올려본 푸른 하늘에는 이미 달이 떠 있었다. 지금 눈물이 흐르는 것도 다 저 하얀 달이 너무 시려서라고 생각했다. 레오가 한 말이 머리에 울렸다. 이즈미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걱정했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모두 앞질러 레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나, 그거 알아?”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의 손에 들린 것은 흙이 잔뜩 묻은 펜이었다. 늘 악보 위를 뛰어다니던 그 펜으로 이번에는 무얼 태어나게 한 걸까.

“고래는 말이야 25Hz 쯤 되는 아주아주 낮은 주파수로 노래를 한데. 인간이 들어도 아름다울 만한 노래를 말이야.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주인이 지구에 오면 인간이 아니라 고래에게 말을 걸지도 모른다고 해.”

흙이 묻은 손으로 레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 발짝 비켜선 자리에 있는 것은 고래였다. 비가 오지 않아 마른 모래사장에 악보에 펜을 긋는 것 마냥 슥슥 그려낸 노래 부르는 고래 두 마리.

“그래서 고래가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었는데 오늘은 무리인가 봐.”

겨울인데도 차갑지 않은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옅은 바람이 불어와 레오의 머리를 흩트려놓았고 그 바람이 이즈미에게도 닿는 동시에 레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 청춘을 바쳐 지켜내고 세나의 청춘을 바쳐 이어간 나이츠야.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 않아. 으음, 그때도 쉽게 쓰러진 건 아니었던가?”

예전의 아픔을 우스갯소리로 삼는 말에도 그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니까 있지, 세나. 돌아오면 다시 나랑 고래를 보러 와줄래?”

엉망으로 흐트러져 다시 평소의 모습이 되어버린 레오의 모습에서 눈만이, 그 눈만이 마치 이즈미를 뚫는 검 같았다. 처음만나 같이 유닛을 하자고 했을 때도 저런 눈이었다.

“이런 때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반했어?”

“애매하게 의문문으로 말하지 마. 확실하게 하란 말이야 바보 왕님... 아니, 레오군.”

“좋아! 그럼 다시 말할게. 같이 부르기로 한 거, 이왕이면 끝까지 어울려줘 세나.”

“어리광이 심하지 않아?”

눈물은 이미 그쳤다. 어디까지 어울려 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고래를 보러 와 고래의 노래를 들을 때 까지 어울려 주면 되는 거겠지. 멋지게 마무리 지으려던 청춘은 제멋대로에 어리광까지 심한 레오군 때문에 멋대로 연장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웃는 모습을 보자 이건 이것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레오군이 없는 봄이 온다. 그래도 괜찮아. 이번에는 기약 없는 단절이 아니니까. 이미 고래의 노래는 눈앞에서 지겨울 만큼 듣고 있었지만 얼마든지 더 들어도 좋았다.

 


“세-나! 다시 고래를 보러 오자!”

까치/@ggga_chi

까치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