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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레오] 아직 어른입니다

이즈레오 합작 참여글


그날은 오랜만에 이즈미와 레오, 두 명이 동시에 일이 없는 휴일이었다. 한명이 한가하면 어느 한쪽이 바빠져 기껏 같이 살기 위해 마련한 집도, 그 안을 채운 가구들도 의미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그 쓸모를 하는 날이었다.

동시에 그날은 레오가 세 번째 반지를 잃어버려 이즈미가 어떤 것을 결심 한 날이기도 했다. 맞춘 지 세 달도 채 지나지 못한 반지였다.


“이럴 거면 문신이라도 새기지 그래?”


핀잔이 아닌 진심이었다. 식탁에 마주앉은 두 명 중 그의 왼손 약지에만 얇게 세공이 들어간 은반지가 반짝였다.


“헤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잘라 내버리지 그래? 손가락채로.”


웃는 얼굴로 한 그 말 또한 진심이었다. 반쯤 비운 그릇을 뒤로하고 이즈미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 쓸모를 다 하던 집은 갑자기 의미를 잃었다. 반지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이름으로 집을 산 건 올해 초의 일이었다. 역과 가깝지만 인적이 드문 시외에 세워진 신축맨션의 꼭대기 층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집이었다. 근처에 사람이 없는데다 외관을 칠한 하얀 페인트가 아직 티 없이 반짝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설사 지하 감옥이라 해도 집이라면 성(城)이라는데 이왕이면 좋은 곳을 고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와 모델, 그리고 동시에 가수라는 직업특성 상 따로 떨어질 일이 더 많은 둘이었지만 그렇기에 같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성인이 되고 레오는 거의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이즈미도 이즈미대로 일이 바빴지만 그만큼은 아니었다. 종종 며칠간 먹을 것을 가지고 가면 음표들이 둥실거리는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있거나 눈 밑이 거뭇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레오가 있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밤낮없이, 그리고 어떨 때는 날짜도 상관없이 며칠이고 작곡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작업실 옆에 집을 구해 살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레오는 유성팬으로 그려 지워지지도 않는 음표들이 가득한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운 채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하지만 집은 집으로 놔두고 싶잖아?”


휴식은 휴식이고 일은 일이니까! 그래서 고른 곳이 작업실에서 적당히 떨어진 이곳이었다. 위치는 함께 골랐지만 같이 쓰는 거실과 부엌 기타 등등의 속을 채운 것은 언제나와 같이 이즈미였다. 그건 고등학교 때부터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어른이 된 세나 이즈미의 취향을 듬뿍 담은 집의 완성이었다.

두 명이 쓰기엔 조금 넓은 원목 식탁과 폭신한 카펫이 깔린 거실, 진한 남색과 하얀색으로 맞춰진 깨끗한 부엌, 같이 브런치를 즐길 테라스가 있고 노란색의 장난감 같은 우주 천채 모형이 침대 옆에서 빙글빙글 도는 따뜻하고 푸근한 안방. 따로 있는 시간이 더 긴 커플들의 집이 으레 그렇듯 실용적이기 보다는 단지 서로의 취향만이 뚝 뚝 묻어나는 장소가 되어버렸지만 둘에게는 충분히 훌륭한 성(城)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둘의 싸움이야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시작의 뿌리부터 취향의 끝까지 맞는 게 없는 둘이었기에 그런 부분은 서로 익숙해진 후였다. 사귄 게 자그마치 6년을 넘어가는데 이즈미의 폭언을 빙자한 애정도 레오의 인스피레이션으로 바뀐 사랑도 장님처럼 안 보이는 척 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최소한 이즈미에게 있어 문제는 마치 눈에 들어간 모래알처럼 까슬거리는 레오의 태도였다.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말이 나올 때마다 당연히 끝이 있을 거라 말하는 듯 한 그 행동이 거슬렸다.


‘헤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른이면 좀 제대로 정하란 말이야, 짜증나게.”


침대 위의 하얀 베개를 들어 거실과 통하는 문에 있는 힘껏 던졌다. 너머의 거실은 조용했다.

 

 


확 짐이라도 싸서 나가버릴까.

이즈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가봤자 혼자서는 제대로 밥도 못하는 저 바보가 걱정되어 결국 3일 뒤 쯤 단축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 미래가 선명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기에는 자존심이 있었다. 애인과 맞춘 커플링을 세 번씩이나 잊어버린 데다 대답도 저모양인데 아무것도 안하고 있자니 짜증밖에 나지 않았다. 한숨과 동시에 테라스의 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가 눈에 띄었다. 레오의 담배였다.

테라스와 안방을 연결하는 투명한 문 앞에 서 있던 이즈미는 곧 결심한 듯 문을 열고 테라스의 철장에 기댔다. 사람의 소리 없이 풀벌레 소리만 울리는 이곳은 브런치 이외에도 레오가 종종 담배를 피우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즈미의 손에 들려있는 길고 흰 것.

넘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머리칼이 살랑였고 담배를 든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가 보였다. 반지를 잃어버려서 문신이라니, 이즈미 자신이 생각해도 늘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으로서는 무모하고 치기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홧김에 한 말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온 것은 마찬가지로 안부인사 없이 가버린다.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 사이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이즈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즈미에게는 지울 수 없는 것이 필요했다. 이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고 불규칙한 곳에서 최소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남는 것. 하지만 어릴 적부터 겪은 경험으로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거야.”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남을 반지가. 당장 오른손으로 쉽게 벗겨 버릴 수 있는 반지가 아니라. 이즈미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레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이즈미만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그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이제는 그 수가 달라졌다. 많은 이들이 그의 노래를 원했고 또 이즈미도 다양한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 섰다. 더 이상 둘만의 세계가 아니었고 그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어른.’


다 큰 어른이지만 이즈미는 늘 무언가 증표를 가지고 싶었다. 부정 할 수 없고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 따위 멍청한 어른들의 쓸데없는 감정이라 비웃었던 아이는 십년이 조금 더 지나 자신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 감각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얼얼했다.

카메라는 찍히는 것이지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었고 노래는 부르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지금 이즈미의 손에 들린 담배가 피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반지도 마찬가지였다. 몸에 지니는 것이지 영원히 간직하도록 새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즈미는 그러고 싶었다. 어른의 바보 같은 독점욕이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어른이지만, 그러고 싶은 게 나쁜 걸까?

이즈미는 발코니에서 레오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새하얗고 가늘고 긴 담배는 아린 멘솔향이었다. 그 끝에서 연기가 나고 숨을 한번 들이키려는 직전에 그릇들이 부딪히는 높은 소프라노의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곧 파열음이 닫힌 문을 넘어왔다. 담배가 반지를 낀 손 안에서 힘껏 구겨졌다.


“아 정말! 레오군 안 다쳤어?!”


 

 

“미안.”


이즈미가 대답이 없자 우물쭈물하던 레오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면 예쁜 짓이라도 해봐.”

“응?”


레오의 고양이 같은 녹안이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움직이더니 조심스레 양손을 들어올렸다.


“웃츄?”

“별로 안 귀여워.”

“갸르릉?”

“위협이지 귀여운 짓이 아니잖아? 아이돌 몇 년차야 레오군.”


아직 담배냄새가 덜 가신 손으로 레오의 양 볼을 죽 잡아당겼다. 몽글한 볼은 잡아 늘이는 대로 늘어나 마치 고양이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세나, 아직도 문신 새기고 싶은 거야? 나는 괜찮은데 세나는 모델이잖아.”

“그럼 안 잃어버리면 됐잖아. 바보 아냐? 완~전 짜증나.”


쉴 새 없이 날아오는 타박에 웬일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나 그날 술 마시고 왔던가?”

“엄청 마시고 들어왔잖아. 머리끝까지 취해서는 방도 구분 못해서 엉뚱하게 창고로 들어가고 말이야.”


그때 아직 볼이 잡혀 있던 레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 볼이 빨개진 채로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마치 평소처럼 영감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레오는 창고용으로 쓰던 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곧 손에 작은 과자 캔을 들고 나왔다. 세 된 소리와 함께 열린 캔 안에는 반짝이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하나도 두 개도 아닌 세 개가.


“역시 여기 있었구나!”


와하하 역시 난 천재야! 쓸데없이 하나 더 붙은 말에 한 대 더 맞게 되었지만 볼을 꼬집혔을 때와 같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술 먹고 들어와서 왜 여기에 넣어놓은 거야?”


레오가 들고 나온 과자 캔은 어릴 적 팔던 고급 과자의 낡은 케이스였다. 완전히 낡아버려 뚜껑의 아귀도 잘 맞지 않는 캔 안에는 오래된 사진 몇 장과 종이, 그리고 반지들이 들어있었다.

손으로 써내려간 낡은 악보, 어린 동생과 처음 찍은 사진, 처음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 상을 받았던 날의 사진, 처음 유닛복을 입고 세나와 같이 찍은 사진, 고등학교의 졸업 사진, 그리고 반지 세 개. 이즈미는 사진을 순서대로 넘겼다. 어린 그들이 자라 무사히 어른이 된 레오가 그의 앞에 있었다.

레오는 악보를 들고는 멋쩍게


“형편없네.”


라며 웃었다. 이즈미도 웃으며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낡은 악보는 아마 레오가 처음 만들어낸 곡이지 않을까 짐작했기에 그 캔이 레오에게 어떤 의미인지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담배냄새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결국 애인의 술주정 때문에 그렇게 고민했다니, 다시 볼이라도 꼬집어줄까 하다가 손을 내렸다.


“반지들 찾았으니까 이제 문신은 안 해도 되는 거지?”

“왜 하기 싫어하는 건데?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더니.”

“나는 헤어질 생각 없는데, 세나는 혹시 모르잖아.”

“바보같이. 어른이면 확실하게 말하라고.”


어린아이같이 확실한 것을 원한 이즈미나 소중한 것들을 작은 상자에 담아놓는 어린아이 같은 레오나 결국 비슷했다. 그렇기에 사귀는 것이겠지만, 말할 필요는 없겠지.


“세나, 이제 어른인거야?”

“아직 어른인거네요.”

까치/@ggga_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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