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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레오] Tropical night

열대야


더웠다. 더워서 당장 누구 하나 길 가던 이를 죽여 버린다 해도 지나가던 모두 더위에 미쳐 빨리 어딘가로 들어가기 위해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로 더웠다. 축축 쳐지는 게 아무리 봐도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지금 누군가 말이라도 건다면 이즈미는 연예계생활이고 뭐고 새까맣게 잊어버리고서 온 힘으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나, 살아있어?”

이마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덜 짠 손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었다. 저 바보가 그래도 용케 걸레나 행주가 아닌 걸 들고 온 게 어디냐며 자기합리화를 하던 이즈미의 머릿속이 바람 한 점 없는 더위에 잠식되어 삑사리나는 소리를 재생했다. 볼륨조절 기능 따위 상실된 지 오래였다.

“아 진짜! 에어컨도 고장 난 방에 왜 사람을 부른 거야!”

“아니 고장난건 아니라니까.”

궁색한 변명 따위 뇌 속 까지 익혀버리는 더위를 식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쿄를 휩쓴 늦여름 마지막 더위였지만 둘에겐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이 방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전화가 온 것은 오전과 오후에 걸친 모델일이 끝나고 노을이 아직도 검은 아스팔트를 아지랑이로 지지던 오후 6시였다. 언제나 두서없는 메시지만 보내놓고서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던 바보가 웬일로 전화를 건 것이다. 그것도 남들이 아직 제대로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시간에. 18도에 맞춰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검은색 승용차의 운전석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이즈미는 전화를 받았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채로 듣는 목소리는 밝았고 내용도 밝았다. 그러니까, 여러 방향으로.

“세나, 바빠?”

요는 얼마 전부터 바쁘게 처리했던 일감들이 오늘 오전부로 모두 끝났으니 놀러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피차 성인인 연인을 이 시간에 집에 오라고 한 것은 목적에 그것도 포함된 것이었고 이즈미는 평소대로 차를 몰고 가 시내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콘돔 자판기에 500엔 동전 두 개를 넣었다. 더위는 잠깐이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레오의 집에 도착했고 뭐 그다음은 평소대로. 밥을 먹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잔소리도 좀 하고 몸으로도 하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니 마지막 건 좀 많이 좋았지만 여하튼. 다 좋았는데 대체 어디부터 일이 꼬인 건지. 가슴팍을 흐르는 땀을 대충 손으로 훔쳤다. 침대에 닦아 봐도 끈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다시 되짚어 봐도 전부 저 바보가 원인이었다. 이즈미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눈을 흘겼다. 바보는 열심히 뭔가를 찾다가 다시 악보를 휘갈기고 이것저것 뒤엎고 다시 찾기의 연속이었다. 습기에 악보는 바닥에 착실하게 붙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더위를 식히지 못하는 무용지물의 허밍이나 무용지물인 에어컨과는 달리 말이다.

그래, 생각났다. 낮에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에 눅진해져버린 뇌가 기억해내길 마지막 일이 문제였다. 레오는 추위는 고양이보다 타면서 더위는 타지 않는지 평소에도 에어컨을 그렇게 틀지 않았고 이즈미도 직전까지 에어컨을 쐬었던 데다 오랜만에 온 연인의 집이어서인지 이 집에서 에어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순서를 착실히 밟고 온 몸에 열이 오른 채로 침대에 누워있을 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직후의 노곤한 적막함에 튼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여름 끄트머리라고 해야 할지 가을의 초입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때에 갑작스레 찾아온 열대야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우리는 리모컨이 없었다. 선풍기도, 심지어 부채도. 그래 그게 문제였다.

“리모컨은 어디 있어?”

“응?”

세나의 젖은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레오는 그 대답에 먼 산을 한번 보고 다시 세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고민하다 또 다시 먼 산을 보더니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없다고.

아마 잃어버렸을 걸? 까치집이 지어진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거리는 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이겠지만 하고 난 직후의 콩깍지가 쓸모없게도 오늘은 빌어먹게 더운 날이었고 열대야였다. 그것도 하필 한 후에 없다고 말하다니, 온 몸에 열이 바짝 오른 후에 말이다! 심지어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조차 미지근했다. 분명 옥상의 직사광선에 뜨겁게 달궈진 물탱크 덕분이겠지.

아 죽여 버릴까. 레오군 몸무게가 분명 53kg이였지. 하지만 하면서 잔뜩 뺐으니까 조금은 줄었지 않을까? 그 정도면 충분히 들쳐 업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사람이 몸에 힘을 빼면 더 무거워지니까 뭐에 싣고 옮겨야 할까.

“세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시끄럽고 빨리 리모컨이나 찾아.”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흘렀다. 이제는 닦을 기력도 없었다. 가까스로 옷장을 뒤져 저번에 개켜놓고 갔던 잠옷바지를 꺼내 입은 것은 좋았지만 한밤의 더위에 눅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거고 저거고 제습제고 죄다 멍청했다. 분명 저 녀석도 같이 눅눅한 잠옷을 입었는데 더운 기색도 없었다. 레오군은 일본이 총기허용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 감사해야 할 거다.

“알겠다! 아이스크림 생각하는 거지?”

“정확하네. 아이스크림으로 레오군을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야.”

“으음 하겐다즈 딸기 맛을 100개 동시에 먹으면 가능할, 아 아냐 나 찾을게 응!”

눈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끄덕이는 얼굴을 고개를 까닥여 쳐다보다 다시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뤄졌을 계획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하고 난 후에 땀을 좀 식히다 아래 층 편의점에 가서 방금까지 떠들어대던 목적이 바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사와 바보 같은 말이나 떠들어대는 토크쇼를 보며 시시덕거리다 자고 갈 생각이었다. 희망온도 18도의 에어컨과 함께. 땀 한 방울 없이.

이제 완전히 달도 넘어간 밤이지만 같이 가버리지 않은 더위와 침대와 이즈미가 한 몸이 될 때쯤 레오가 이즈미의 눈앞으로 걸어왔다. 손에 들린 것은 팔랑팔랑 거리는 오선지가 그려진 종이었다.

“짠! 이것 봐.”

“리모컨이야?”

“고개 들어서 보면 되잖아. 세나”

“들 힘도 없어.”

“<열대야에 죽어가는 세나의 얼굴을 본 나>”

“그거, 설마 노래 제목이야?”

“줄여서 열대야. 아니 그건 너무 뻔하니까 영어로 해볼까. 영어로 분명 그거였는데, 트로피 나이츠?”

“트로피컬 나잇 이겠지.”

그 대답과 동시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보의 손에 들린 것은 악보와 펜과 리모컨이었다. 잃어버린 덕분에 하고 난 직후의 애인을 쪄죽일 뻔한 그 리모컨. 하필 에어컨이 리모컨 없이는 작동되지 않는 기종이라 에어컨 째로 부셔버릴까 애인이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던 바로 그 리모컨.

세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망온도 18도에 맞춰진 바람은 차갑다 못해 서늘할 정도였다. 바람 소리와 함께 악보가 팔랑였다. 제목의 열대야 부분을 힘껏 쥐었다.

“그게 말이지, 땀에 젖은 세나 얼굴을 보자마자 팟! 하고 인스피레이션이 와 버린 거야. 파팟 하고 말이야! 음음! 역시 자연은 위대해! 따끈따끈한 명곡이 탄생해버렸어!”

정확히는 땀에 젖어 죽어가며 애인을 어떻게 죽여 버릴지 고민하던 애인의 얼굴을 본 애인이 작곡한 애인과 같이 부를 노래 아니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세나는 아무 말 없이 레오의 앞에 서 방긋 웃었다. 희망온도 -18도의 웃음이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레오의 얼굴에 곤란한 일이 생길 때 지으면 세나가 도와주는 웃음이 떠올랐다.

“냉동실에 하겐다즈 있는데 먹을래? 에어컨 온도 더 낮춰줄까?”

웃음이 더 차가워졌다. 말이 없는 애인을 위해 온도를 더 낮춰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곡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명곡이니까 그럴 리는 없는데.”

애인은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열대야에 뇌가 이제 완전히 녹아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세나?”

대답 없는 세나의 양 팔이 올라갔다. 레오를 완전히 덮을 만큼.

 

 

‘열대야는 내일 저녁까지 지속되니 다들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뉴스캐스터였습니다.’

까치/@ggga_chi 오란다/@oranda_or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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