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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혁독자] 제논의 역설

학교AU

눈을 감고 ‘세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귀여운 옆집의 꼬마들, 중학생이면서 교복에 캡모자를 눌러쓰며 사부라는 말을 복창하고 다니는 후배, 친구라기엔 여러모로 뛰어나고 성실해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주는 사람, 분명 성격은 맞지 않지만 이상하게 죽이 잘 맞는 녀석, 언제나 잘 따르는 착실하고 착한 후배, 친구지만 누나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람, 사춘기 즈음부터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애정을 담아 부르는 어머니, 거기다 수많은 책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 중요한 것은 뒷자리의 친구, 14년을 짝사랑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김독자의 세계는 그랬다.

 


“아저씨 학교가요?”

“형 이번 주 주말에는 놀아줘요!”

“아저씨는 나랑 놀기로 했거든?”

“야 신유승, 형이 언제 그랬어?”

“얘들아 너희 학교는 안가니?”

김독자는 자신의 양다리에 매달려 제 할 말을 쏟아내는 아이들을 내려 보며 웃었다. 각각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을 맨 아이들은 몇 번 더 투덕거리다 손을 방방 흔들며 인사했다.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 마주보고 손을 흔들었다. 집에서 나와 옆집에 사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이어지는 길을 조금 더 내려와 모퉁이를 돌면 그의 집이 나왔다. 8시 20분이되기 5분 전, 그 성격처럼 언제나 똑같은 시간이었다.

“왔나.”

“중혁아, 너 그러다 군대 가면 중대장으로 오해받겠다.”

실실거리며 김빠진 농담을 건네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걸음을 시작하는 유중혁은 눈으로 빨리 오지 않고 뭐하느냐는 시선을 보냈다. 하늘을 올려보자 맑은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였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교문을 지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교복 재킷에 선도부 뱃지를 달고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정희원이었다.

“김독자씨 아침부터 그 얼빠진 얼굴 좀 어떻게 해봐요. 그리고 유중혁씨. 대체 교복 안에 검은 목티 입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 만난 그녀는 동갑임에도 붙이는 웃긴 존칭을 바꿔보라는 말에 막무가내였다. 독자씨는 독자씨니까요. 그렇죠? 같은 반이 됐던 그 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덕분에 매번 아침등교시간마다 웃음을 멈추기 힘들었다.

“독자씨 오늘도 제때 오셨네요.”

“상아씨가 더 일찍 오셨는걸요.”

“독자씨 중혁씨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현성씨도 좋은 아침이에요.”

“야 김독자. 너 체육복 있지? 윗옷 좀 빌려줘.”

“나 어제 들고 가서 안 들고 왔어. 그리고 너랑 나랑 사이즈 다르거든? 희원씨한테 빌리지 그래.”

“아 진짜 걔랑은 어색하다니까. 알면서 뭘 물어? 야 유중혁 네 옷은… 됐다. 됐다니까. 노려보지 말라고! 저번에 아이스크림 묻힌 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투덜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한수영을 마지막으로 시끌벅적한 아침인사가 끝나고 창가자리 5번째 6번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앞자리에 앉아 언제나와 같이 교과서가 아닌 좋아하는 소설을 펼쳤다.

 

 

김독자가 책상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보인 것은 수학선생의 얼굴이었다. 칠판에 가득한 수식들이 대충 마무리 된 걸 보면 평소와 같이 잡담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책에 다시 얼굴을 박은 김독자의 귀로 선생의 말이 들렸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거북이를 아킬레스보다 100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10m를 가고,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스가 10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다시 1m를 나아간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거북이도 마찬가지로 움직이므로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제논의 역설이다.”

‘제논의 역설’. 아무리 끝에 다가가도 결코 그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논의 역설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결과와 다른 결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말 그대로였다. 우리는 결국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잡을 것을 알고 있다.

선생은 잠이 와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해했느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김독자는 상쾌하게 모르겠다는 얼굴로 유중혁은 명쾌하게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뒷자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느냐면 글쎄, 김독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이런 잡담에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점이 좋았다. 이번 교시가 끝나면 점심시간인데 메뉴가 뭐더라. 김독자는 서랍 속 급식 표를 확인하고 고개를 숙여 웃었다.

 


“급식이 만두라니 중혁이 기분 좋겠네~”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마라 김독자. 제대로 불러.”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만두를 급식판 가득 받은 유중혁의 얼굴은 꽤 만족스러워보였다. 단지 같이 나온 반찬이 달걀 토마토 볶음이라는 것이 거슬렸지만 남들이 보기 전에 잔반통에 버리면 잔소리도 없을 일이었다.

“나이가 몇인데 편식이냐 편식은.”

“그 나이에 키가 멈춰버린 한수영씨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렇게 가리는 게 많으니까 성격이 그 모양이죠, 김독자씨. 밥 먹고 담타?”

소곤거리는 마지막 말에 유중혁이 둘을 노려봤다. 한 번만 더 걸리면 반으로 꺾어버린 담배처럼 허리도 꺾어버리겠다던 말이 생각났다. 김독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너 5교시 음악시간에 부를 노래 준비는 했어?”

“안 했지만 그래도 평타는 치겠지.”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리던 한수영이 식판을 들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말을 꺼내놓고 혼자 도망치다니 치사하다고 투덜거리던 김독자는 눈앞에서 쏘아보는 눈빛에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끊었지?’

‘끊었다니까 그러네.’

별 수 없이 급식판 위의 만두를 반으로 나눠 건네주자 유중혁은 이번만 봐준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김독자는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키득거렸다.

 

 

“중혁아 너는 목소리는 좋은데 왜 노래는 못 불러?”

“시끄럽다.”

“보통 가수들은 목소리도 좋던데.”

“시끄럽다고 했다.”

“아 그래도 그 점이 귀여우니까 괜찮아.”

음악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다음 번호의 학생이 실기평가를 위해 단 위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김독자는 유중혁의 귀에 속닥거렸다.

“그래도 올해는 ‘가’는 안 나오겠지? 너 저번 학기에 음악만 ‘가’라 엄청 화냈었잖아.”

“화낸 적 없다.”

“너 보컬 트레이닝 영상 보고 연습도 했었으니까 이번엔 못해도 ‘양’은 나오지 않을까?”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얼굴에 내가 너에 관해 뭘 모르겠냐는, 자랑인지 애매한 것을 으쓱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꽤 들을 만 했어. 중학교 때에 비하면 정말 발전이라니까?”

“김독자!”

“거기! 또 너희 둘이니! 실기시간에는 조용히 하라니까 정말.”

마지막 말에 결국 폭발해버린 유중혁의 고함소리에 다른 학생들은 또 그러냐며 웃었다. 선생님의 잔소리에도 떠들다 제일 뒷자리로 유배를 당했음에도 늘 결과는 똑같았다. 김독자는 날아오는 교과서를 피하며 웃다 결국 한 대를 맞고야 조용해졌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주번! 일지 쓰고 교무실에 꽂아놓고 가라. 그럼 반장 인사.”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김독자는 자습시간 내내 잔 낮잠으로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익숙한 뒷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중혁아. 너 일지 다 쓰면 모퉁이 놀이터 앞에 새로 생긴 분식집 갈래? 찜기 있는 거 보니까 만두도 하는 거 같더라.”

일지를 쓴다고 고개를 숙여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흔들리는 머리칼을 보니 그도 김독자의 의견에 동의한 모양이었다. 아무 말 없이 계속 펜만을 움직이는 모습이 고집스러웠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길게 해질녘의 노을이 가득했다. 그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유채색의 교복을 입은 모습은 퍽 어울렸다.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넥타이를 목 끝까지 올린 것 까지도.

“중혁아 오늘 정말 재밌지 않았어? 급식으로 나온 토마토만 빼면 말이야.”

“좋았지.”

웬일로 돌아온 긍정적인 답변에 김독자가 의자를 기울이며 웃었다. 무척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실내화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같이 리듬을 탔다.

“그래서”

일지는 마지막 장이었다. 펜이 사각이는 소리가 무엇보다 선명했다. 마치 이 곳이 두 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우주인 것처럼.

“이건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지.”

“마음에 들지 않은 거야?”

“완벽했지. 영원히 멈추고 싶을 만큼. 하지만 끝을 보기로 했지 않았나.”

일지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끝이었다. 분명히 일지의 날들은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었다. 단지 늘 마지막 장을 쓰고, 그 다음날 또 다시 마지막 장을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중혁은 소리가 나게 일지를 덮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같이 보자고 했지 않았나, 김독자.”

쳐다보는 눈이 심장을 찔렀다. 아침에 보았던 그 생생한 눈빛보다 닳은 듯한 눈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김독자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째로 멈추고 싶었을 만큼.

창밖은 이제 어둠뿐이었다. 저 멀리서 빛나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을 상자 같은 교실은 떠돌고 있었다. 마치 어린왕자의 상자 같았다. 그리고 그 상자는 열리지 않았기에 어린왕자는 원하는 양이 된 것이다.

 


제논은 말했다.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살은 어느 점을 지날 것이다. 한 순간 동안이라면 화살은 어떤 한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 다음 순간에도 화살은 어느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결국 화살은 항상 머물러 있으므로 사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제논은 옳았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마주보며 웃었다.

끊임없이 오를 수 없는 계곡을 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과 영원히 멈출 수 없는 흐름에 흘러가는 것. 어느 것이 더 괴로울까. 김독자는 알 수 없었다. 유중혁도, 알 수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아직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았으니까.

까치/@ggga_chi 오란다/@oranda_or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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